1780년 7월 프랑스의 루이 16世는 장 드 로샹보백작지휘하에 6,000명의 원정군을 아메리카에 파병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군대가 영국의 해상운송을 괴롭혔으며, 버지니아의 영국군 증원과 재보급을 뉴욕市에서 출항하는 영국 함대가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총 1만 8000명에 달하는 프랑스와 아메리카의 육군과 해군은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에 들어서서도 콘월리스의 영국군의 공격을 따돌렸다. 마침내 1781년 10월 19일 버지니아 연안의 요크타운에서 포위당한 콘윌리스 장군은 그가 거느린 8,000명의 영국군과 함께 투항했다. 콘월리스의 패배로 전쟁이 즉시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이 전쟁은 그후로도 거의 2년이나 더 끌었다--새로 들어선 영국정부는 1782년 초 파리에서 아메리카 측을 대표하는 벤자민 플랭클린, 존 애담스 및 존 제이와 더불어 강화협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783년 4월 15일 대륙회의는 최종적으로 타결된 강화조약을 승인했고 영국과 그 전식민지들은 9월 3일 이 조약에 서명했다. 파리 조약으로 알려진 이 강화조약은 13개 전식민지주의 독립과 자유와 주권을 인정하고, 이들에 대해 영국이 서쪽으로는 캐나다까지, 남쪽으로는 플로리다에 이르는 영토를 부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플로리다는 스페인에게 돌려주었었다. 7년 전에 리처드 헨리 리가 말했던 풋내기 식민지들이 마침내 "자유, 독립의 주" 가 된 것이다. 이들 州들을 하나의 국가로 엮는 일이 아직 남았다.
오늘날 미국은 독립전쟁이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면에서 그것은 내란이기도 했다. 미국내의 소위 왕당파("Tories")는 독립전쟁에 반대하여, 독립파(그들이 말하는 반도)에 대항해서 무기를 든 자도 많았다. 왕당파의 수는 높게는 50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는 아메리카 식민지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된다. 그러면 왕당파들은 무슨 동기에서 그런 입장을 취했을까? 왕당파이건 독립파이건, 아메리카의 모든 교육받은 사람들은 인간의 자연권(생득권)과 제한된 정부에 관한 존 록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왕당파도 독립파와 마찬가지로 인지조례나 강압법제정과 같은 영국의 행동을 비난했다. 왕당파는 폭력은 오히려 폭민지배나 폭정을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평화적인 항의의 형식을 추구하기를 바랐었다. 그들은 또한 독립을 하게되면 영국의 중상주의체계의 일부로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혜택을 상실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왕당파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들어있었다. 그 다수는 농부, 기술공 및 소매상인들이었다. 대부분의 영국 관리들이 영국왕에게 충성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청교도사회인 뉴잉글랜드에서는 부유한 상인들은 영국 국교회의 목사와 마찬가지로 왕당파로 남는 경향이 있었다. 왕당파에는 또한 (영국으로부터 자유를 약속받은)일부 흑인, 인디언, 연기하인 및 독일계 이민도 포함되었는데, 이들 독일계 이민은 주로 영국왕 조지3세가 독일 계통이기 때문에 영국왕을 지지했다. 왕당파의 수는 각 식민주마다 달랐다. 뉴욕주 인구의 반은 왕당파였던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여기에는 귀족문화가 있었으며, 독립전쟁중 내내 영국군의 점령하에 있게 되었다. 남북 캐롤라이나에서는 오지의 농민들이 왕당파였으나, 해안지대의 대농장주들은 독립전쟁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독립전쟁 중 대부분의 왕당파들은 별다른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약 1만 9,000명의 왕당파는 영국이 제공한 무기와 공급품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파리 강화조약으로 아메리카 의회는 왕당파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되돌려 주어야했다. 예컨대 펜실베이니아의 윌리엄 펜의 후계자들과 메릴랜드의 조지 캘버트의 후계자들은 관대한 해결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파와 왕당파 간의 반목이 유난히도 심했던 남북 캐롤리아니에서는 왕당파들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됨으로써 큰 자산이 중류층 농민들에게 분할됨에 따라 사회혁명이 일어났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아들인 윌리엄 프랭클린과 당대의 가장 훌륭한 미국 화가인 존 싱글턴 코폴리를 포함하여 약 10만 명의 왕당파가 미국을 떠났다. 그들 대부분은 캐나다에 정착했다. 몇몇 주에서는 왕당파에 속했던 사람이 공직을 갖지 못하도록 했으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독립전쟁 후의 수십년동안에 미국민들은 왕당파에 관한 일을 잊고자 했다. 코플리를 제외하고는 왕당파는 미국역사에서 말살된 사람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