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나라 사람들, 아메리카人은 어떤 사람들인가?" -- 헥터 세인트 존 드크르브꿰르, 1782.
17세기에 아메리카에 온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영국인이었지만 중부해안지역에는 네덜란드인, 스웨덴인 및 독일인도 살고 있었고, 사우드캐롤라이나 등지에는 소수의 프랑스 위그노 교도들도 살고 있었고, 아프리카로부터 데려온 노예들은 주로 남아메리카 식민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1680년 이후로는 영국은 이미 이들 이민의 주요 원천은 아니었다. 수많은 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유럽 대륙을 떠나왔다. 정부의 탄압과 부재지주 제도로 말미암은 가난을 피해 고국을 떠나 이곳으로 온 사람들도 많았다. 169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메리카 인구가 25만 정도로 늘어났다. 그때부터 매 25년마다 2배로 늘어나, 1775년에이르러서는 250만을 넘어섰다. 정착민들은 물론 매사추세츠로부터 버지니어로, 또는 사우드캐롤라이나로부터 펜실베이니아로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도 옮겨가 살 수 있었으나 각 식민지들 간의 차이는 현격했다. 식민지 3개 지역 집단 가의 차이는 더욱 그러했다. 식민지의 정착지들은 그 지역의 기후와 지리적 조건에 알맞게 발달된 경제의 성격에 따라 그 구분이 상당히 명료해졌다. 농작물의 성장 기간이 길고, 기름진 토양을 가진 남부의 식민지에서는 농업 위주의 사회가 발전했다. 뉴욕,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및 델라웨어 등 중부의 식민지들은 살림지대, 농업에 적합한 평야 그리고 필라델피아나 뉴욕과 같은 큰 항구도시를 발전시킨 항만이 있는 보다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아메리카 동북부의 뉴잉글랜드는 대체로 토질이 박하고, 돌이 많으며, 평지가 비교적 적고, 겨울이 길어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지방이었다. 그래서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사람들은 수역을 이용하여 방앗간과 제재소를 만들었다. 주위 삼림에는 목재가 많아 조선업이 발전했다. 천혜의 항만이 많아 무역이 발달하여, 바다는 큰 부의 원천이 되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대구 잡이의 수산업 만으로도 재빨리 번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의 대부분이 항만 일대의 촌락이나 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무역업이나 사업에 종사했다. 공유의 목초지와 임지는 근처에 작은 농장을 경작하고 있는 주민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주민들이 밀집해 살고 있기 때문에 마을학교와 마을교회 그리고 주민들이 모여서 공동의 관심사를 의논하는 공회당이 생겨났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상업을 계속 확장해나갔다. 이 식민지는 17세기 중반부터 번창하여, 보스턴은 아메리카의 가장 큰 항구의 하나가 되었다. 배의 선체부분을 만들기 위한 오크(참나무) 목재, 돛대와 원재를 만들기 위한 긴 소나무 목재, 그리고 배의 이음매를 위한 역청(송진)은 동북부의 삼림에서 나왔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선장들은 자기들의 배를 직접 만들어 전세계의 항구를 찾아 항해함으로써 차츰 그 중요성이 증대해가는 무역의 토대를 닦았다. 그리하여 식민지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영국 선적의 배의 3분의 1은 뉴잉글랜드에서 건조된 것이었다. 바다에서 잡은 고기, 선박용품 및 목재 기물로 수출이 급증했다. 뉴잉글랜드의 선박업자들은 이윽고 럼주와 노예가 이문이 큰 상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가장 진취적인 무역관행의 하나는 소위 "삼각 무역"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후일의 도덕 기준으로는 좋지 않은 것으로, 상인과 선박업자가 뉴잉글랜드산 럼주를 주고 아프리카 연안의 흑인 노예를 사서, 그 노예를 서인도제도에서 팔고, 그곳에서 럼주 생산업자들에게 팔기 위한 당밀(럼주의 원료)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방식이 그것이었다.